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상 파괴주의 (문단 편집) === 레온 3세의 성상 파괴령 (726년) ===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위협과 정국 불안정으로 인한 [[20년간의 혼란]]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현실에 절망한 국민들은 성상에 의존했고 급기야 [[이콘|성화]] 자체를 노골적으로 숭배하거나 세례식에서 성화를 대부모로 사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과도한 성상 숭배 풍조는 소아시아의 많은 [[주교]]들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성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여기고 이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제국, 나아가 기독교권 전역에 확산시키고자 노력했다. 717년 3월에 즉위한 [[레온 3세]]는 그해 이슬람 세력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무너져가던 제국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레오는 성상을 불리한 전황을 뒤집는 데 활용했다. 가령,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군에게 포위되었을때 기적을 일으키는 성화로 유명했던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길을 가리키는 [[성모 마리아]]) 성모상'을 치켜들고 도시 성벽에서 행진하게 했다.[* 626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도 마찬가지로 했었다.] 그 결과 동로마군은 용기를 얻어 침략자에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본래 시리아 출신이었던 레온은 내심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성상 파괴주의를 신봉했다. 721년 칼리프 [[야지드 2세]]가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성당, 시장 주택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상들을 즉각 파괴하게 했을 때, 레온은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또한 레온은 725년에 대중들 앞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 행위가 [[모세]]의 [[십계명]] 중 둘째[* [[유대교]], [[정교회]], [[개신교]] 기준. [[가톨릭]]과 [[루터교]]에서는 1계명의 일부로 본다.]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마라.]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726년 여름, 테라 섬과 테라시아 섬 사이의 에게 해에서 해저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해일이 발생했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레온은 이를 제국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하고 성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며 본격적으로 성상 파괴 운동을 개시했다. 그는 우선 소피아 대성당의 입구에 위치한 칼케 대문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형 성화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파괴 작업을 감독하는 지휘자에게 거센 공격을 가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고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에게 해의 함대와 트라키아의 육군에서도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727년, 라벤나 총독령의 백성들은 황제가 성상 파괴운동을 벌이는 것에 격노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파울로스(라벤나 총독)|파울로스]] 총독은 살해되었고 휘하의 관리들은 달아났다. 반란군은 자체적으로 지휘관을 뽑고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또한 투시아에서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하다 3년만에 진압되었다. 레온은 군대를 파견해 라벤나의 반란군을 제압하는 한편 3년간 동서방의 교회 지도자들과 협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황제는 73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 제르마노스를 해임하고 유약하고 고분고분한 성직자 아나스타시오스를 세계총대주교로 앉힌 뒤 마침내 성상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으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성상(조형물)|성상]]과 [[성물]]들이 파괴되었고, 성상을 간직한 자들은 체포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소아시아 남부의 카라비시아노이 테마와 그리스 지역의 헬라스 테마에서도 [[아갈리아노스 콘토스켈레스]] 등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당했다.[* Cyril Mango의 '[[https://books.google.co.kr/books?id=ZZ82psJ2pLEC&pg=PA139&lpg=PA139&dq=hellas+theme+727&source=bl&ots=9NH4ZIGuXX&sig=ACfU3U0VSDctbeQ2TDZSyW3azLLLHNDmlw&hl=en&sa=X&ved=2ahUKEwitnZuE3qvzAhXIa94KHXPjCbsQ6AF6BAgMEAI|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의 139p 중, 'In 727 the Carabisian Theme and the Theme of Hellas rebelled against him, possibly because of the edict; but he defeated them.']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이러한 황제의 칙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레온은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으나 아드리아 해에서 풍랑으로 침몰해버렸고 그 직후 교황은 병으로 사망했다.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731년 초 황제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교회들에서 나오는 연간 수입을 몰수해버리자 그해 11월에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상에 불경스럽게 손을 대는 자는 파문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황제는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그리고 발칸 지역의 교구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로 옮기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렇듯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갈등은 성상 파괴운동으로 인해 갈수록 격화되었다. 참고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관할구역상 경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정해졌던 다키아 및 마케도니아 관구와 트라키아 관구[* 여기서의 관구는 교회 관구가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이래의 고대 후기 로마 제국의 세속 관구이다.]가 이 때까지 그대로 왔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지금 정교회의 통칭이 '그리스' 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때까지 오늘날의 그리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북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저 경계선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산하에 있었는데, 레온 3세가 교황의 관할에서 떼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줌으로써 이 때부터 정교회 및 그 전신에 속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